가로등이라도 켜지면 가라 간들바람에 벚꽃 잎 하르르 날리는 곗날, 수런수런 친구들 저녁상을 차리러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선화같이 잔잔한 웃음 짓던 그녀 “야, 좀 더 있다 가자 나는 휑한 바람만 가득한 집에 지금은 가고 싶지 않다 순간, 친구들 겨울날 빨랫줄에 널어놓은 바지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
여름엽서 우화각*에 앉아 혼자 있다는 풍경을 본다 이 큰 절에서 소리가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정진하는 그 모습 새삼 놀랍다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결에 유월을 만났다 저만치 풀 베는 기계소리 잘리면서나는 풋풋한 풀내음 순수한 그 내음은 한 통의 여름 엽서였다 *우화각: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
게와 소년 -이청준 생가에서 소소리 바람 대나무가지 부대끼는 소리 가슴 시린 길손만 집을 보고 장독 옆 누렁고양이 느린 햇볕을 덮고 진달래 흐드러졌을 나지막하게 엎드린 앞산 모퉁이 돌아 갯가, 게 잡던 소년 보이지 않고 청준아! 어머니 목소리 들릴 듯한 갯벌 게, 퉁 나온 눈으로 곁눈질 껌벅껌벅 나의 이야기 2019.06.15
겨울 창 겨울을 품은 들녘에 눈이 온다 네 살배기 딸아이는 창가에서 베개를 밟고 까치발로 서서 세상 나서 처음으로 언 창을 호 불며 밖을 본다 겨울을 물고 있는 들녘 온돌방 온기는 김이 되어 자꾸 창을 가리고 아내는 아까부터 딸아이의 안간힘을 꿈을 꾸듯 눈을 보는지 아이를 보는지 강아지 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
간밤에, 밤 사이 별빛도 없는 길을 따라 해맑은 각시꽃에 목걸이를 걸어 놨다 밤 사이 달빛도 없는 어둠속 보랏빛 초롱꽃에 귀걸이도 걸어 놨다 누가 다녀갔을까 잠 설친 밤 멀리 범종 소리 같은 천둥자락일까 새벽안개 속 창문을 두드린 손끝이었을까 꽃잎 이슬 마음에 걸어둔 아침 청개구리 한 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
고무신 ㅡ풀잎문학관 풍금 건반 닮은 계단옆 소담한 국화향 한 아름 안아보고 시장통 세월에 겨운 간판 청국장이 쌀쌀해진 날씨를 덥혀준다 다리목 햇솜 같은 솜사탕 돌돌 돌아갈 때마다 솜 타래처럼 부풀어 진다 한 입 베어 무니 사르륵사르륵, 초등 친구 목소리가 들리는 듯 나도 한번 먹어보자! 하굣길에서 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
빗소리 한참 꿈을 꾸다 잠이 깼다 빗소리, 가슴이 콩닥콩닥 어둠 속에서 내려올 때도 방울들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땅에 떨어져 튀어 오를 때도 어깨 높이가 같다 몇 십 년 지나도 변치 않는 그 소리 닮고 싶다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소리 마음속으로 세다 빗소리 베고 다시 잠이 들려나, 나의 이야기 2019.06.15
맹골수도 -팽목항 사흘 째 늑대들은 사월의 들판에 누워있는 새끼 양들을 덮쳐 목덜미를 물고 살려 달라! 소리치는 어미들의 울부짖음 기도도 외면한 채 더 목을 조이고 작은 포구에는 며칠째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붉게 핏발 선 눈동자들 숯덩이만 남은 가슴들은 숨을 쉬기도 버겁고 아무도 가족들의 울분을 대신해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
청운의 학 -선일여고* 하얀 깃을 단 학들이 오후 라일락 향기 어리는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바닷물을 떠받을 듯 하늘을 잡을 듯 무한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눈 오는 겨울도 풀 향기 가득한 이름 봄에도 학들은 이슬을 밟고 해지는 노을을 따라 청운의 날개를 피로한 줄 모르고 펄럭이고 있다 *선일여고: 서울특별.. 나의 이야기 2019.06.15